‘깨닫다’는 ‘깨다’와 ‘닫다’가 어우러진 말입니다. ‘깨다’는 잠에서, 꿈에서, 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살아 숨쉬며 움직이는 현실에 다시 눈을 뜨고 건너오는 노릇입니다. 즉 ‘깨다’는 잠을 자고 꿈을 꾸고 술에 취한 듯 흐리고 멍청하던 삶에서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 맑고 또렷한 본살의 삶으로 건너오는 것을 말합니다. ‘닫다’는 있는 ‘힘을 다하여 달려간다’는 뜻입니다. 가야 할 곳, 삶의 과녁을 겨냥하여 힘껏 내달린다는 뜻입니다. 결국 ‘깨닫다’는 흐리고 멍청하던 삶에서 정신을 차리고 맑고 또렷한 본살의 삶으로 건너와(깨다) 곧장 삶의 과녁을 겨냥하여 내달린다(닫다)는 뜻입니다.
‘깨닫다’라는 말은 ‘알다’라는 말과 질적으로 다릅니다.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보며, 입으로 맛보고, 코로 맡고, 귀로 들으면서 부지런히 노력하면 어느 정도 길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깨달음은 노력한다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로지 제 마음을 가라앉히고 깨끗하게 비워서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뿐입니다. 변덕스럽게 줄곧 날뛰는 느낌도 눌러 앉히고, 쉴 새 없이 허둥대며 헤집으려 드는 생각도 잠재우고, 불쑥불쑥 고개 들고 일어서는 뜻도 잘라버리고, 그런 후에 거울같이 고요해진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깨달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참된 깨달음에 이르려면 우선 깨우침을 쌓아야 하고, 깨우침이 쌓이면 깨침에 이르고, 깨침을 거듭 쌓다보면 어느 날 느닷없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깨우치다’는 다른 사람의 힘으로 깨어나는 것을 말하지만 ‘깨치다’는 스스로 깨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즉 깨우침은 수동적·타율적으로 얻어지지만 깨침은 능동적·자발적으로 생깁니다. ‘깨치다’는 ‘깨다’와 ‘치다’가 합쳐진 말입니다. 여기서 ‘치다’는 북을 치고 종을 치는 것처럼 ‘깨다’에 힘을 보태는 도움가지입니다(《우리말은 서럽다》, 김수얼 저, 나라말, 2009).
깨닫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큰 깨달음을 통해 지금까지와 다른 삶을 살고 싶은 생각은 누구나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거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쉽게 알려고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깨달음은 안 들리던 귀가 어느 날 갑자기 뻥 뚫리는 것처럼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깨달음을 얻으려면 우선 깨달음을 얻은 사람으로부터 무수히 깨져서 무지몽매한 자신이 깨우침을 얻어야 합니다. 스스로 깨지는 걸 창피하게 생각하거나 두려워해서는 깨우침이 올바르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깨우침은 깨짐의 결과입니다. 깨우침 덕분에 스스로를 깨뜨리게 되고 깨침이 찾아옵니다. 즉 깨침은 깨드림의 결과입니다. 깨침이 축적되다보면 깨달음이 불현듯 찾아옵니다. 깨달음은 또 다른 깨달음에 의해서 무참히 깨져야 합니다. 이렇게 스스로를 부단히 깨뜨리다보면 새로운 깨침이 옵니다. 이런 깨침은 이전과는 다른 깨달음을 선사해줍니다. 결국 깨우침과 깨침, 그리고 깨달음은 종착역이 없는 영원한 미완성 교향곡입니다.
●● 나를 키우는 물음표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어떤 깨우침을 받고 있는가? 깨우침을 통해 지식을 반추하고 성찰하다보면 새로운 깨침을 얻을 수 있다. 익숙한 것과 정든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깨침을 얻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 Start Again
쪼개지기 전에 깨져라. 쪼개지면 회복이 불가능하지만 깨지면 깨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