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의 정서와 기질을 대변하는 한마디를 꼽으라고 한다면 꽤 많은 사람들이 “정열”을 떠올릴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세계 최고의 축제 중 하나인 브라질 리우 카니발과 그 카니발을 화려하게 수놓는 삼바댄스의 현란한 장면들이 워낙 강렬하게 와닿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남미대륙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는 정열보다는 애환에 가깝다.
15세기말 이래 이 땅에서는 가혹한 식민지배의 역사가 이어졌고 원주민들은 질곡의 시간을 견뎌내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남미를 대표하는 문화로 자리잡은 탱고만 하더라도 그 기원을 살펴보면 이민자들의 애환이 짙게 배어있는 음악이고 춤이다.
탱고는 1860년대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몬테비데오 두 도시의 하층민사회에서 시작되었다.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후예들, 그리고 먹고살 길을 찾아 유럽을 떠나온 이민자들은 저녁이면 항구, 사창가, 목로주점 등지에 모여들어 한바탕 노래와 춤으로 일상의 고달픔을 달래곤 하였다. 탱고라는 용어도 아프리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원래는 18~19세기 무렵 아프리카 노예 출신들이 모여 향수를 달래며 춤추던 장소를 일컫는 말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상류사회나 가톨릭 교회는 이를 비루한 하층문화로 치부하고 철저히 외면하였다. 춤도 너무 관능적이고 저속하다고 하여 공공장소에서는 허용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본고장에서 천대받던 탱고는 20세기에 들어와 아이러니하게도 파리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우게 된다. 당시 파리는 모든 이들이 동경하던 세계문화의 본산이자 고급 사교의 무대였던 곳. 파리를 중심으로 1920년대 유럽 탱고가 황금기를 구가하게 되자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상류사회도 뒤늦게 탱고를 다시 보게 되고 이를 독자적인 예술장르로 인정하기에 이른다. 자신들의 고유문화를 외면하다가 유럽풍이 가미되어 역수입되자 비로소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파리지앵의 안목이 탱고를 살리고, 오늘날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훌륭한 문화로 키워낸 셈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바로 도자기 문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15세기까지 고려-조선은 세계 일류의 도자기 생산국이었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는 중국인들도 찬탄해 마지않던 명품이었다. 그런데 16세기 이후 우리의 도자기문화는 급속한 쇠락의 길을 걸었다. 대신 그때까지 허접한 토기 제작 수준에 머물러있던 일본이 새로운 도자기 본산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 반전을 이끈 것이 아리타 도자기다.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큐슈 사가번의 번주 나베시마는 귀국길에 조선 도공을 여럿 끌고 갔고 그 중 한명인 이삼평(李參平)에 의해 아리타(有田)에서 일본 최초의 백자가 탄생한다. 이삼평은 사무라이 이상의 대우를 받으며 번주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조선 백자에 다양한 채색과 기법을 가미하여 한층 업그레이드된 아리타 도자기를 구워냈다. 마침 그 시기 중국은 명, 청 교체기를 겪었기에 유럽으로의 도자기 수출이 어려워졌고, 이에 유럽 상인들은 아리타로 눈을 돌려 수백만점의 생활도자기와 예술품을 유럽으로 실어 날랐다.
이삼평은 훗날 도자기의 신으로 추앙받기에 이르렀고 오늘날 아리타에는 그를 기리는 신사까지 세워져 있다. 인구 2만에 불과한 아리타 마을에는 연간 2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몰려들고, 매년 4~5월에는 성대한 도자기축제를 열어 부(富)와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세계 일류를 구가하던 조선 도자기는 왜 허망하게 몰락하고 아리타 도자기가 그를 대신하게 되었는가? 바로 문화에 대한 안목과 문화인을 대하는 인식의 차이 때문이었다. 조선 백자는 왕실과 소수의 양반들에게만 허용된 사치품이었지 대중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도자기를 만드는 장인도 천민 또는 하층상민으로서 사회적 대우를 전혀 받지 못하였다. 일본은 달랐다. 그들은 도공이 가진 기량을 높이 샀고 도공을 기술자로 우대했다. 신명이 난 도공들은 질 좋고 다양한 자기들을 생산해내었고 도자기 문화는 일본사회에서 빠르게 자리를 잡아나갔다.
비단 문화뿐이겠는가. 세상을 읽는 안목의 차이가 한 개인을 위인으로 만들기도 하고 나아가 사회나 국가의 명운을 가르기도 한다.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4차산업혁명시대에는 더욱 그렇다.